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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추천여행지 - 자운서원 율곡이이 서원

JUN나무 2017. 9. 1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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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운서원 율곡이이 서원 - 파주추천여행


9월이나 10월 이쯤에 날씨가 선선해지고 놀러가기 좋은 계절이 다가오면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 파주 추천여행지를 자주 찾게 되는데 교육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꼭 가봐야 할곳이 많은데 대표적으로 율곡이이를 추천하는데 그중에서도 자운서원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자운서원에는 율곡기념관이 있는데, 전시된 유물 중 많은 부분이 신사임당과 관련한 유물이니 둘러보면서 한 아이의 어머니이자 시인으로, 또 화가로 재능 있는 삶을 살았던 그녀의 모습을 살펴보면 좋습니다. 



율곡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십만양병설’이다. 각 도에 1만, 도성에 2만의 군사를 길러 앞으로의 변란을 대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그의 주장은 배척되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은 그가 죽은 지 몇 년 지나지 않아서이다.

자운서원은 우람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양쪽에서 지키고 있다. 느티나무를 지나 솟을삼문을 밀고 들어가면 높은 지대 위에 아담하게 앉은 서원이 있습니다. 



최근에 정비해 다시 지은 서원은 사괴석 담장을 둘렀으며, 건물구조는 익공계 형식에 합각지붕이다. 정면 3칸집으로 정남향의 볕받이 집이어서 따스하게 느껴집니다. 서원 앞에 신도비를 세웠습니다. 높고 두툼한 머릿돌을 놓고 화강암의 비문을 세운 다음 얇고 날렵한 지붕돌을 얹었습니다.


자운산 깊숙이 들어가면 율곡의 부모, 율곡 내외를 비롯해 한 가계의 묘 13기가 집결해 있습니다. 한 가문의 묘가 같은 지역에 족분을 이루는 것은 성리학의 주자가례(朱子家禮) 영향으로 고려 말부터 행해져 조선시대까지 친족공동묘가 일반화되다시피 했습니다. 맨 위에 율곡 내외 묘가 앞뒤로 자리잡고, 그 앞에 율곡의 맏형 부부 합장묘, 그 앞에 율곡의 부모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합장묘, 율곡 맏아들 부부 합장묘가 세로 일자로 자리잡은 다음, 좌우로 다시 누이·매부·5대손·8대손까지 집결해 있는 광범위한 가계묘역입니다.


참고자료

자운서원
이 서원은 조선 광해군(光海君) 7년(1615)에 조선 중기의 대학자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유림들로 인하여 창건되었다. 효종(孝宗) 원년(1650)에 '자운(紫雲)'이라 사액을 받았으며, 그 뒤 숙종(肅宗) 39년(17B)에 그의 후학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과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 1632∼1695) 두분을 추가 배향하여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그러나 조선후기인 고종(高宗) 5년(1868)에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빈터에 묘정비(廟庭碑)만 남아 있다가 1970년 유림의 기금과 국가지원을 받아 복원하였고 1973년 경내 주변을 정화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팔작지붕으로 된 사당(祠堂)과 삼문(三門) 등이 있으며 담장 밖에는 묘정비(廟庭碑)가 세워져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이며 높은 대지위에 세워졌다. 최근에 사당 전면에 강당과 동재, 서재, 협문, 외삼문을 신축하고 주변을 정비하였다. 사당 내부에는 이이의 영정을 중심으로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를 모셨으며 매년 음력 8월 중정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자운서원묘정비
자운서원 묘정비(紫雲書院 廟庭碑)는 자운서원의 역사를 적은 비로 자운서원의 자운문 밖 우측에 위치해 있다. 이 비는 자운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선생의 학덕을 기리는 한편 자운서원의 건립내력을 기록하고 있다.비의 받침돌은 2단으로 이루어졌는데 아랫단은 두꺼운 판석 4장으로 짜 맞추어지대석(地臺石)을 만들고 그 위에 사각의 비좌(碑座)를 놓았는데 복련문(覆蓮紋)이 새겨져 있으며 측면에는 연주문(蓮珠紋)과 괴운문(怪雲紋)이 조각되어 있다.비문은 예서체로 되어있는데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짓고 당대의 명필인 곡운 김수증(谷雲 金壽增)이 썼으며비명은 김수항(金壽恒)이 썼다. 비의 상단에 ‘자운서원 묘정비(紫雲書院廟庭碑)’라는전액(篆額-머리글)이 쓰여져있으며 비문 끝의 ‘숭정56년계해(崇禎五十六年癸亥)’라는 연기로 보아 비의 건립연대가 숙종 9년(1683)임을 알수 있다.

율곡이이묘
조선중기의 대학자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의 묘이다. 이이는 중종 31년(1536)에 강릉 북평촌의 외가에서 출생하여 6세에 어머니 신사임당과 함께 서울 본가로 올라와 어머니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명종 3년(1548) 13세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이후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에 호조좌랑에처음 임명된 이후 황해감사, 대사헌,대제학, 호조, 병조,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예견해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하였으며,대동법 실시와 사회제도의 개혁에 노력하였다. 학문에 있어서는 퇴계 이황과쌍벽을 이룬 유학자로 근본원리를 종합적으로 탐구하는 것을 학문연구의 태도로 삼았으며, 학문을 이론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시책으로 민생과 국가 재정 문제에 적용하려고 하였다. 선생의 저서로는《성리설》,《성학집요》, 《격몽요결》등이 있다. 현재 묘역에는 선생의 묘와 부인 곽산노씨의 묘가 위·아래로 인접해 있으며, 묘 오른쪽에는 묘비가 있고, 좌우로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이 한 쌍씩 있는데, 이이의 명성에 비해 소박하고평범한 묘제 형식이다. 후대에 묘비 1기가 추가되었으며, 신사임당 묘를 비롯하여 가족묘 13기가 함께 조성되어 있다.


신사임당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류 예술가이자 율곡이이(李珥)의 어머니인 신사임당(1504∼1551)의 묘소이다. 묘는 남편 이원수(李元秀)와 합장묘이다. 신사임당은 조선 연산군 10년(1504)에 강릉에서 진사(進士) 신명화(申命和)의 무남 5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19세 때 이원수에게 출가하였는데 친정에아들이 없어서 남편에게 동의를 구한 뒤 친정에 머물렀다. 그 후 시댁의 오랜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서 생활하기도 하였고 38세가 되어서 서울 수진방 시댁에서 시댁살림을 주관하고 슬하에 4남 3녀를 둔 다복한 생활을 하였다. 본명은 신인선(申人善)이고 사임당은 당호(堂號:이름대신 허물없이 부르거나 쓰기 위해 지은이름)로써, 최고의 여성상인 중국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뜻이다. 사임당은 어려서 경전(經典)에 능통하였으며, 7세 때 이미 산수도(山水圖), 포도도(葡萄圖)를 그렸는데, 여성적인 섬세함과 정교함을 발휘하는그의 화풍은 따를 자가 없었고, 필법(筆法)도 능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이와 같은 대정치가이자 대학자를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로서, 남편을 잘 보필한 아내로서, 그리고 교양과 학문을 갖추고 천부적 소질을 발휘한 예술가로서 우리나라 현모양처의 본보기로 평가되고 있다. 묘역은 봉분 앞 중앙에 묘비가 있고 묘비 앞에 상석과 향로석이 일렬로 놓여있고 좌우에는 키작은 문인석 1쌍이 자리잡고 있다. 후에 새로 세운 까만 돌(烏石)로 만든 묘비 1기가 묘 뒤편에 있으며,상석 앞부분은 화강암 바닥으로 단장하였다.


율곡이이신도비
율곡이이신도비는 자운서원 경내의 좌측 산기슭에 세워져 있는데 조선 중기 대학자인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선생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이다. 이신도비는 율곡선생이 돌아가신지47년이 지난 인조 9년(1631) 4월에 건립된 것으로 비문은 이항복(李恒福)이 짓고 신익성(申翊聖)이 썼으며 전액은 김상용(金尙容)이 썼다. 비의 재질은 대리석으로 앞뒷면에 걸쳐 각자(刻字)되어 있는데 앞면에 몇 군데의 총탄 흔적이 있다. 비의 규모는 높이 223cm, 너비 109cm, 두께 39cm이며 현재 비각을 지어 보호하고 있다. (출처 : 파주시청 문화관광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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